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실연당할 때 한 번쯤은 낚여서 산다는 ‘사랑의 기술‘의 저자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책이다. 물론 난 이번에는 안낚였다.

이 책을 구매했던 이유는, 심리학 서적 하나 읽을 생각에 서점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책의 크기가 딱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문고판 사이즈에 가까울 정도로 작고 얇은 크기다.

전체적으로 번역 품질은 껄끄럽다. 앞 부분은 여러번을 반복해서 읽었고 뒤에는 수월하게 읽혔는데, 그 이유는 번역 때문도 있지만 글의 논조 때문도 있다. 앞부분은 자신의 심리학적 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여러 주변 상황을 설명하고 비판하는데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다. 정작 주제가 희미해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호한 편이다.

그러다가 중반에 그 모든 해결은 ‘사랑’이라고 정의하면서 빠른 호흡으로 글이 나아가고, 그 후에 ‘억압’이나 ‘자아찾기’ 같은 원래 말하고자 했던 키워드가 나오면서 (아주) 빠르게 글이 나아간다.

많은 정신의학자들은 – 정신분석학자들 역시- 결코 너무 슬프거나 너무 분노하거나 너무 흥분하지 않는 ‘정상적’ 인격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들은 ‘유아적’ 혹은 ‘신경증’과 같은 단어를 이용해 ‘정상’인의 전통적 모델에 맞지 않는 인성 유형이나 특징들을 비난하였다. [93p]

위 문장에 동의하는게, 우리나라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ADHD를 과잉 진단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강박증을 과잉진단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이해가는게 자살률 1위의 나라에서는 걱정이 앞서긴 한다.

어떤 아이에게 매일 학교 가는 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물론이죠!”라고 대답한다면 의심스럽다. 물론 학교에 가고 싶을 때도 많겠지만 놀거나 다른 짓을 하고 싶을 대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나는 매일 학교에 가고 싶다’고 느낀다면 그 아이가 규칙적인 등교에 대산 자신의 거부감을 억압했을 가능성이 있다. [133p]

‘에이 뭐 이런걸 갖고. 작가가 순진하지 않은건가’라는 생각을 가졌지만,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바는 ‘자아란 무엇인가’다.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게 정말 행복한건지 행복을 사회적으로/상황적으로 강요당한건지에 대해서 묻는다. 그에 대한 비유로 ‘레코드판 플레이어가 저는 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레코드판 플레이어 외에 모두는 그 플레이어는 그저 바이올린이 저장된 레코드판을 돌릴 뿐이라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정신이 확 들었다.

모든 종류의 모욕과 비하에도 이런 무능력이 나타난다. 이 경우에도 행동은 모욕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타인이 옳고 자신은 모욕당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자발적 감수 사이를 오간다. (…)때로는 상대에게 때로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154p]

위의 문장은 사실 내 얘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화나게 하는 말들을 들으면 그냥 웃어넘기지만 뒤늦게 분노할 때가 많다. 나의 정신건강에 늘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그를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 그런 내면의 성숙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으로 살 것이다. [190-191p]

에리히 프롬은 자아의 인식에서 출발해서 자아를 순수하게 보는 것에 성공하면 타인도 온전하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그 수준이 되면 자아를 찾고 보다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 있다.

진짜 삶의 첫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 두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 또 한가지 조건은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193-198p]

이 책의 결론은 위의 세가지다. 즉,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조건이다. 이렇게 써놓으니 이 책의 논거는 그리 단단하지 않고 희미하다는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책 중간중간 말줄임표(…)가 있던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실제로 원서를 축약한건지 원본이 그런건지 설명을 찾지 못했다. 다만 여러 개의 에리히 프롬의 미발표작을 엮어서 낸 것이라고 하는데 이곳저곳에서 따온 글을 엮으면서 논거가 건너뛴 구간을 표시한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번역서의 입장에서 이런 편집은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다. 독자가 꼭 그 말줄임표를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독자를 이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말줄임표 편집은 독자에게 물음표만 던지고 답을 안한 모양새다.

Advertisements

2 thoughts on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1. 에리히 프롬… 오랜 만에 듣는 왜인지 친숙한 이름이네요. 글 속에서 코멘트 하신 내용에 동의하는 부분이 우리 대부분이 사회 생활을 원만히 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또는 오랜 시간 사회가 만든 심리적 억제틀 속에 살고 있다 보니 사물 또는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왜곡 형상으로 또는 아예 못본체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죠. 그러다보면 개인은 끊임없는 자존감 하락도 겪게되고 불행해지는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길 바라면서 말이죠. 그럼, 오늘도 행복하세요. 🙂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